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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비행이 시작된 지 몇 시간이 지나고, 기내는 조용해졌다.
늦은 밤. 대부분의 승객이 잠든 가운데 한 남자가 객실을 천천히 살피며 지나간다.
박시후, 33세.
180cm의 키에 70kg의 균형 잡힌 체격. 깔끔하게 정돈된 짙은 갈색 머리와 눈가를 살짝 스치는 긴 앞머리. 눈꼬리가 제법 길고 속쌍꺼풀이 있는 깊은 눈매에 진한 갈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다. 입가에는 승객을 대할 때 자연스럽게 번지는 부드러운 미소가 머물러 있다.
그는 단정한 유니폼 차림으로 조용히 객실을 살핀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와 젠틀한 말투가 편안한 인상을 준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한 여자에게 멈춘다.
잠들지 않고 책을 읽고 있었다.
주변의 작은 소음도 신경 쓰이지 않는 듯 책에 깊이 빠져 있는 모습.
시후는 무심코 책 표지를 바라본다.
순간 그의 눈빛이 아주 조금 달라진다.
그 책을 알고 있었다.
평범한 소설이 아니다. 그 세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제목만으로도 의미를 알아볼 수 있는 특별한 책.
시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간다.
하지만 잠시 뒤 다시 객실을 돌아오면서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도 시후를 보고 있었다.
짧게 마주친 시선.
시후가 자연스럽게 말을 건넨다.
“아직 안 주무세요?”
“네. 책이 재미있어서요.”
그녀가 책을 살짝 들어 보인다.
시후의 시선이 다시 책 표지에 머문다.
“재미있는 책인가 보네요.”
“혹시 아세요?”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시후가 희미하게 웃는다.
“조금요.”
그는 더 묻지 않고 지나간다.
그런데 그날 밤, 그녀는 이상하게도 계속 시후를 찾는다.
물을 부탁할 때도.
담요가 필요할 때도.
다른 승무원이 아닌 그를 부른다.
시후는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같은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그녀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차린다.
물을 건네는 순간, 그녀의 시선이 시후의 팔뚝에 닿는다.
소매 아래로 작은 레터링이 살짝 드러나 있다.
시후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한다.
그녀 역시 그를 바라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이번에는 누구도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말은 없지만 서로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있다는 듯한 순간.
얼마 후 착륙 안내 방송이 나온다.
기내 조명이 다시 밝아지고 승객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난다.
시후는 승객들을 배웅하며 그녀의 좌석 앞에 멈춰 선다.
“오늘 비행은 괜찮으셨어요?”
“네. 덕분에요.”
시후가 자연스럽게 미소 짓는다.
“다행이네요.”
그는 작은 관광지 안내 책자를 그녀에게 건넨다.
“여기 처음 오신 거죠? 가볼 만한 곳이 꽤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녀가 책자를 받아든다.
시후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낮은 목소리로 덧붙인다.
“안쪽도 한번 살펴보세요.”
“안쪽이요?”
“네. 여행에 도움이 될 만한 게 하나 있을 겁니다.”
그는 더 설명하지 않고 다른 승객에게 향한다.
비행기에서 내린 뒤, 그녀가 관광지 안내 책자를 펼친다.
페이지 사이에 작은 카드 하나가 끼워져 있다.
일반적인 관광 안내 카드와는 다른 특별한 표식.
그 카드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단순한 카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손끝이 카드 위에서 멈춘다.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던 시후의 눈빛이 떠오른다.
그 카드를 가지고 약속된 장소로 갈 것인지.
카드 없이 그곳을 찾아갈 것인지.
이제 선택은 그녀에게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