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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당신의 가격
사람에게도 가격이 매겨질 수 있을까.
누군가는 돈으로 명예를 사고, 누군가는 권력으로 타인의 침묵을 산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살기 위해 자신의 가장 절박한 순간을 누군가에게 저당 잡힌다.
당신에게 돈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동생의 병원비. 끝없이 쌓이는 청구서. 아무리 계산해도 줄어들지 않는 숫자들.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자존심마저 내려놓아야 했던 밤, 당신은 한 남자의 문을 두드렸다.
차서원.
서른아홉의 나이에 서울 상류층의 미술계를 쥐고 흔드는 갤러리 관장. 세련된 정장과 값비싼 시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그에 관해 알려진 이야기는 대부분 화려했지만, 정작 그를 가까이에서 안다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눈을 가졌고, 사람의 욕망에 가격을 매기는 법을 알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손해 보는 거래를 하지 않았다.
“돈이 필요하다고?”
처음 만났던 날, 그는 당신의 사정을 듣고도 동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검은 대리석 책상 너머에 앉아 서류를 넘기던 손만 잠시 멈췄을 뿐이었다.
“얼마나 필요한데.”
당신이 금액을 말하자 그제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길고 깊은 눈매가 당신을 천천히 훑었다. 무언가를 판단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불쌍한 사람을 보는 눈도, 쉽게 거절할 사람을 보는 눈도 아니었다.
마치 경매에 나온 작품의 진가를 가늠하는 감정사의 눈.
“갚을 수는 있고?”
그 질문에는 위로도, 비난도 없었다. 오직 대답을 기다리는 건조한 현실만이 놓여 있었다.
그는 당신의 대답을 들은 뒤 계약서를 꺼냈다.
조건은 명확했다. 정해진 날짜에 상환할 것. 약속을 어길 경우 사전에 합의한 절차를 따를 것. 불필요한 거짓말은 하지 말 것.
마지막 조항을 확인하던 그는 펜을 내려놓고 희미하게 웃었다.
“돈을 빌리는 사람들은 대개 두 부류야. 갚을 생각이 있는 사람, 그리고 갚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은 사람.”
그가 계약서를 당신 쪽으로 밀었다.
“넌 어느 쪽이지?”
그날 당신은 돈을 얻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함께 내주었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
몇 주가 흘렀다.
서원 갤러리의 밤은 낮과 전혀 달랐다. 관람객이 사라진 전시장에는 작품을 비추는 조명만 남았고, 유리창 너머의 서울은 빗물에 번져 있었다. 고요한 복도를 지나 VIP실에 들어서면 희미한 위스키 향과 가죽 냄새가 섞여 들었다.
밤 11시 40분.
차서원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검은 셔츠의 단추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은빛 시계가 드러났다. 손가락 사이에서 라이터가 느리게 굴러갔다.
테이블 위에는 당신의 채무 내역이 적힌 서류가 놓여 있었다.
그는 서류를 한 장 넘기다 말고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왔네.”
낮고 나른한 목소리. 마치 오래전부터 당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가 테이블 위로 내려갔다.
“앉아.”
차서원은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당신이 어떤 말을 꺼낼지 기다리는 대신, 그는 먼저 서류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종이 모서리를 맞추는 손길까지 불필요할 만큼 여유로웠다.
“상환 날짜가 다가오고 있어. 그 얘기부터 하려고 불렀는데…….”
그는 말을 끊고 위스키 잔을 들었다. 얼음이 유리 안쪽에서 가볍게 부딪쳤다.
“생각해 보니까 그보다 궁금한 게 생겼거든.”
잔을 내려놓은 그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어두운 조명이 날카로운 콧대와 느슨하게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을 비췄다. 그의 눈에는 웃음기가 남아 있었지만, 그 시선만큼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넌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 침묵이 이어졌다.
“돈 빌려주는 데 인색하지 않고, 계약은 확실하고, 가끔은 꽤 친절하기까지 한 남자?”
그는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아니면 네가 언젠가 반드시 피해야 할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