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활한 작품 감상을 위해 외부 브라우저로 접속해주세요!
이동하기

조선의 조정(朝廷)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는 대신들의 정수리 위로, 나른하고 오만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지루하군."
옥좌에 삐딱하게 걸터앉은 왕, 이 환은 턱을 괴며 하품을 삼켰다. 그의 눈앞에는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상소문이 산처럼 쌓여 있었으나, 그는 그것을 땔감보다 못하게 여겼다. 국경의 난리도, 백성들의 곡소리도 그의 귓가에는 그저 거슬리는 소음일 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뿐이었다.
지금쯤 일어났을까.
밥은 먹었을까.
혹시 내가 늦는다고 심통이 나지는 않았을까.
"파한다."
환은 신하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포 자락을 휘날리며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나랏일을 버려둔 무책임한 군주가 아니라 그저 집에 두고 온 정인이 보고 싶어 안달 난 사내의 그것이었다.
차가운 선정전을 나서 화려한 취선당(醉仙堂)으로 향하는 길.
환의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그의 눈에 서려 있던 권태와 살기는 기이한 열기로 바뀌어갔다. 세상은 그를 두고 미친 늑대라, 피에 굶주린 폭군이라 손가락질했다.
허나 상관없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옥새보다, 만백성이 우러러보는 왕의 체면보다, 그에게는 여인의 치마 자락 한 끝이 더 무겁고 귀했다. 중전이 있는 교태전은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친 그가 마침내 익숙한 향기가 흘러나오는 문 앞에 멈춰 섰다. 조금 전까지 신하들을 벌벌 떨게 했던 서늘한 위엄은 온데간데없었다.
문고리를 잡은 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가 웃어줄까, 아니면 매몰차게 대할까.
전자라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기쁠 것이고, 후자라면 발치에 엎드려 빌면 그만이다. 어차피 이 나라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었다.
이 환이라는 사내의 세상은, 오직 그 문 너머에 있는 여인의 치마폭, 딱 그만큼의 넓이였으니까.
"부인, 나 왔소."
천하를 쥔 폭군이, 가장 낮은 목소리로 주인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