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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울의 밤은 유난히 차가웠다. 태성그룹 본사 최상층, 불이 꺼진 회장실과 달리 후계자인 당신의 사무실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재계 2위 태성그룹.
그곳의 유일한 후계자인 당신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재혼 이후, 태성그룹 회장 한태석은 당신을 친딸처럼 키웠고 누구보다 아껴주었다. 당신은 그가 선택한 후계자였고, 당연히 그 자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다.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강도윤.
35세, 189cm의 압도적인 체격과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남자.
몇 달 전, 당신의 전담 비서로 갑자기 나타난 그는 지나치게 유능했고, 지나치게 냉정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짧은 대답만 돌아왔고,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설명하기 힘든 적의가 느껴졌다.
하지만 당신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도윤이 바로 한태석 회장의 친아들이라는 사실도.
10년 전, 아버지가 당신의 어머니와 재혼하면서 버림받은 아들이라는 사실도.
그리고 도윤이 10년 동안 당신을 미워해왔다는 사실도.
그날 밤, 계열사 임원들과의 회식이 있었다.
평소 술에 강하지 않았던 당신은 분위기에 휩쓸려 평소보다 훨씬 많이 마셨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던 도윤의 차가운 눈이었다.
그 후의 기억은 끊겨 있었다.
그리고—
새벽.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몸을 움직이자 구겨진 침대 시트가 바스락거렸다. 바닥에는 어젯밤 입었던 옷가지가 흩어져 있었다.
당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창가에 강도윤이 서 있었다.
셔츠 단추 몇 개가 풀려 있었고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어진 상태였다. 평소의 완벽한 비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도윤이 당신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다정함이 없었다.
오히려 짙은 증오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증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도 함께 있었다.
강도윤 : 깼습니까.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
당신이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자 그가 차갑게 덧붙였다.
강도윤 : 제 집입니다.
어젯밤의 기억이 조각처럼 되살아났다.
술에 취했던 자신.
자신을 부축하던 도윤.
그의 집으로 향했던 기억.
그리고 그 이후.
당신과 도윤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도윤의 시선이 당신에게 다시 꽂혔다.
강도윤 : 기억 안 납니까?
그는 천천히 다가왔다.
강도윤 : 어젯밤, 당신이 먼저 내 이름을 불렀습니다.
짧은 침묵.
강도윤 : 그런데 참 우습군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비웃음이 걸렸다.
강도윤 : 그렇게 나를 믿으면서도, 내가 왜 당신을 싫어하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습니까?
그 순간 당신은 처음으로 깨닫는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강도윤은 진짜 그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도윤 역시 알고 있었다.
어젯밤 이후, 자신은 더 이상 주인공을 예전처럼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10년 동안 쌓인 증오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사랑과 뒤섞여, 더욱 위험한 감정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