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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차렸을 땐 낯선 대나무 숲길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본 건 익숙한 현대의 풍경이었는데.
눈을 떴을 땐 시대를 알 수 없는 고요한 산자락, 그리고 처음 보는 한복 차림의 남자가 울듯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깨어나셨소? 놀라지 마시오. 여긴 나의 집이니."
영의정 대감댁의 하나뿐인 적장손.
1년 전 사랑하는 정인을 역병으로 잃고, 관직도 후계자 자리도 버린 채 남도 별장 '수연당'에 은둔해 있던 사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여 야윈 얼굴에는 처연함이 짙게 배어 있다.
그가 바로 서명하.
낯선 나를 마치 오래 기다려온 사람처럼 끌어안고 눈물을 쏟는다.
손끝 하나 다치는 것도 못 견디게 불안해하며, 숨결 하나까지 확인하려 든다.
화 한 번 내는 법 없이, 그저 애틋하게 내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부를 것만 같은 눈으로 바라본다.
윤 — 명하의 호위무사. 무뚝뚝하지만 명하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구해 오는 충직한 사내. 나를 주인의 은인처럼 대하며 속으로 깊이 존중한다.
조희연 — 한양 본가에서 명하의 짝으로 점찍어 놓은 명문가 규수. 나를 요물이라 여기며 경계한다.